이름
: 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 성은 이기(伊祁)(요는 탄생후 외조모집에서 성장하였는데 모계 성씨를 따랐다.), 이름은 방훈(放勳)이고 당요(唐堯) 또는 제요도당(帝堯陶唐)으로도 부른다. 도(陶) 지방에서 태어나 당(唐) 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신분
: 제곡 고신의 아들. 제곡 고신의 세번째 부인이었던 진풍씨(陳豊氏) 혹은 진봉씨((陳鋒氏)의 딸인 경도(慶都)가 제요(帝堯)를 낳았다.
모습
: 순자에서 일컫기를, 요는 키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는 어질기가 하늘과 같고 지혜가 산과 같아 사람들이 가까이 접해보면, 그의 성품이 인자하기가 마치 태양을 우러러봄과 같았다. 부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사람을 깔보지 않았다.
가족
: 제요에게는 단주라 하는 아들이 있었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제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아황과 여영이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제순에게 시집보내고 그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업적
: 역상(曆像)을 발견하여 일월(日月)의 법을 가르치다.
전설 :
1. 제위에 오르다.
《사기(史記)》와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요는 20살에 왕위에 올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요의 치세에는 가족들이 화합하고 백관의 직분이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고 한다. 요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 일족에게 계절의 구분에 따라 농사의 적기를 가르쳐 주도록 하였으며, 1년을 366일로 정하고 백관들을 정비하였다. 또한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할 것을 염려하여 궁전 입구에 감간고(敢諫鼓: 감히 간언드리는 북)를 달아 경계하도록 하였다.
후직이 농사(農師)로 있었고, 수(倕)가 공사(工師)를 맡았으며, 고요(皐陶)가 법관이었다.
기(夔)는 악관(樂官)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순(舜)이 사도(司徒)로 있었고 설(契)이 사마(司馬)로 있었기에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2. 근검하게 살다.
그는 평양부(平陽府-山西省)에 도읍했다. 요임금은 근검하고 소박하여 그의 궁(宮)은 엉성하게 지은 초가였고 그 집의 기둥과 대들보는 산에서 잘라온 나무를 대패질도 하지 않고 거친 그대로 세웠다. 음식은 야채국과 거친 밥을 먹었으며 옷도 마옷이었고 날이 추워지면 사슴가죽을 걸치고 추위를 견뎠다. 그릇과 사발들은 흙으로 빚은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자신을 돌보지 않아 악전이라는 신선이 요를 보고 "저게 임금의 얼굴인가." 하고 동정하여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신령스런 잣을 나누어줬는데, 그것을 받고도 먹을 새도 없이 다시 일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천하는 평화로워져 시골 노인이 평상복 차림을 한 요 임금 앞에서 태평성대에 취해 막대기로 땅을 치며[擊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 일화로부터 태평성대를 뜻하는 격양가가 유래했다.
일국의 국왕이었던 그가 이처럼 검소하게 살자 후세 사람들은 「문지기 같은 말단 관리도 그보다 낫겠다…….」라고 경탄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였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열성만큼은 유달리 강했다. 일설에 의하면 백성중에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나 옷을 입지 못하는 자, 그리고 잘못을 범한 자라도 있으면 그는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고 한다. 「모두가 내 탓이지,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처럼 그는 자신을 나무랐던 것이다. 요임금은 백성의 모든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기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기간동안 가뭄과 홍수가 수없이 닥쳤어도 그를 원망하는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3. 농업를 발전시키다.
제요에게는 후직이라는 이복형제가 있는데 후직이 농사 짓는 법을 알아내어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었기에 후직(后稷)이란 이름이 붙혀져 농사의 신 또는 곡신(穀神)으로 불렀다. 후직의 성(姓)은 희(姬)씨고, 이름은 기(棄)이다.
그의 조카인 숙균(叔均)은 소를 이용하여 농사 짓는 법을 알아냈고 삼신국(三身國) 사람 의균(義均)은 농기구를 개발하여 그 사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신농씨 때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후직의 시대에 이르러 농경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4. 역상(曆像)을 발견하여 일월(日月)의 법을 가르치다.
요임금이 백성을 지도하여 춘하추동의 사계절로 나누고 각기 그 스스로의 업을 장려시키기 위하여 백성들 가운데 현명한 관원을 뽑아 이를 수행해 나아갔다.
광대한 하늘을 잘 관찰하여 일월성신의 운행을 세밀히 조사 기록토록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역을 만들어 널리 백성들에게 가르치니 어느 때가 정월(正月)이고, 파종을 하기 적당한 시기가 언제이며, 추수할 때는 어느 시기라는 것을 온 백성에게 자세히 알리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직책을 맡은 이가 바로 희중, 희숙, 화중, 화숙의 네 인물이다. 희중은 동방ㆍ봄을, 희숙은 남방ㆍ여름을, 화중은 서방ㆍ가을을 그리고 화숙은 북방ㆍ겨울을 맡아 살피었다.
5. 100년의 가뭄
제요가 즉위하기 전부터 계속된 가뭄은 즉위 후 거의 50년을 이어갔다.
6. 22년의 홍수
요의 만년에는 황하가 범람하여 큰 홍수가 났으며, 요는 이를 다스리기 위하여 곤(鯀)을 시켜 9년 동안 치수공사를 하게 했지만, 실패하였다.
7. 제요의 시대는 태평성세였을까?
요순(堯舜)시대는 정말 태평성세(太平盛世)였을까?
요임금의 치세를 말할 때에 앞서 백년간 가뭄이 들었고 뒤이어 이십이년간 홍수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은 지극해서 백년의 가뭄과 이십이년의 홍수에도 백성들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속 깊이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8. 사흉(四凶) - 공공(共工), 곤(鯀), 환두(驩兜), 삼묘(三苗),
여기의 공공이 전욱과 전쟁을 벌였던 그 공공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요는 공공에게 치수를 명한 적이 있다. 이때 공공은 제요의 신하로 공사(工師, 대장장이들을 맡은 관리)를 맡았고 치수를 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으로 치수는 곤에게 맡겨졌고 공공은 제순 때에 유주(幽州)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곤(鯀)에 관해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제의 후예를 낙명(駱明)이라 한다. 낙명과 그의 아내가 하얀 말을 낳았는데 이 말이 바로 곤(鯀)이다. 곤은 우의 아버지다.
요임금 말년에 황하가 범람하여 숭백(崇伯) 곤(鯀)으로 하여금 치수(治水)를 하게 하였다.
곤(鯀)은 황제의 후예로서 천신(天神)의 일족이다. 그런 곤이 홍수를 막고 치수를 위해 둑을 쌓았으며 백성들을 위해 애를 썼으나 결국 사흉(四凶)의 대열에 오른 것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다.
곤은 9년간 열심히 흙을 실어 날라 제방을 쌓았지만, 아무리 둑을 높이 쌓아도 물이 넘쳐 제방이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다. 걱정하고 있던 곤에게 거북이와 올빼미가 와서 천계의 식양에 대해 알려주었다.
식양(息壤)이란 스스로 늘어나는 흙으로 식토(息土)라고도 하며 천계의 옥황상제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갖 작물이 잘 자란다고 한다.
곤은 천계로 몰래 들어가 식양을 훔쳐 제방을 쌓자 비로소 홍수를 다스릴수 있었다. 그러나 상제가 이를 알고 둑이 견딜 수 없는 홍수를 내려 응징했다고 한다.
곤은 자신의 치수정책이 실패하였고 그로 인해 숱한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매우 자책하였다.
요임금은 곤의 치수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축융(祝融)을 불러 보검을 주고 곤을 처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축융은 축융성에 살면서 이름을 소길리(蘇吉利)로 바꾸고 오랫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는데 어느날 홍수로 축융성이 떠내려가자 식솔들과 함께 태원으로 내려왔고 요임금 그들에게 살 집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요임금과 가까이 지냈다.
곤은 요임금이 자신을 법대로 처단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산(羽山)아래 우연(羽淵)이란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품에서 커다란 동물이 기어 나왔는데 누런 곰(黃雄)이었다. 곰은 사람들을 피하여 연못으로 뛰어들어 유유히 사라졌다.
축융이 돌아와 요임금에게 모든 상황을 고하고 보검을 반납하니 요임금과 신하들이 깊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요임금은 축융에게 보검을 다시 하사하였는데 나중에 축융이 이름을 오희(吳回)로 바꾸니 그 보검을 오도(吳刀)라고 불렀다.
곤은 여한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상제의 식양(息壤)을 훔쳐 치수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홍수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 뿐이었다고 한다.
상제에게는 반역이었을지 모르나 홍수에 집을 잃고 높은 산과 동굴에서 배를 곯고 지내는 백성들의 고통을 모른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곤은 죽은지 삼년이 지나도 썩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상제는 곤이 요귀가 되어 다시 살아날 것을 걱정하여 오도(吳刀)로 그의 시신을 베어버리라고 명했다.
오도로 곤의 배를 가르자 그의 뱃속에서 한 마리 규룡(虯龍)이 튀어나왔는데 그 용이 바로 우(禹)이다.
훗날 곤의 아들인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고, 우는 응룡의 도움으로 홍수를 다스릴수 있었다고 한다.
환두(驩兜)는 산해경에 곤(鯀)의 후손으로 나온다.
대황의 한곳에 사는 사람들을 환두(讙頭)라고 한다.
곤이 맞이한 아내 이름이 사경(士敬)인데 사경의 아들이 염융(炎融)이었고 염융의 후예가 환두다.
환두는 사람 얼굴에 새 부리와 날개를 갖고 있다.
환두는 요임금이 순에게 선양(禪讓)을 하자 이에 반대하여 삼묘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환두(驩兜)는 전쟁에 패한 후 부끄러운 나머지 남해에 몸을 던져 죽었다.
요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환두의 아들을 남해에 살게 하였으니 그 자손이 번창하여 환두국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을 보면 얼굴은 사람얼굴과 비슷하지만 새부리가 달려 있어 고기를 잡기에 좋다. 환두국이 비익조의 동쪽에 있다고도 하며 또 환주국(讙朱國)이라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환두가 아닌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丹朱)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혹은 둘을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제요는 단주를 단수(丹水)의 제후에 봉하였고 단수는 삼묘(三苗)와 가까웠으므로 단주가 삼묘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일찌감치 이를 알아챈 요임금은 순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단수로 내려가 단주와 삼묘를 처벌하였다고 한다.
창오산(蒼梧山) 남쪽에는 순임금이 매장되어 있고 북쪽에는 단주(丹朱)가 묻혀 있다.
단주는 자신의 군대가 패하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요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아내를 남해로 가서 살게 하였는데 그 자손이 번성해 환주국(讙朱國)을 이루었다.
물에 빠져 죽은 단주는 죽어서 주(鴸)라는 새로 변했다고 한다. 주(鴸)는 새매처럼 생겼으나 발은 사람의 손 같으며 암 메추라기처럼 운다. 이 새의 우는 소리는 마치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고 한다. 이 새가 나타나는 고장에서는 재능있는 선비들이 많이 쫓겨난다.
삼묘국(三苗國)이 적수하의 동쪽에 있다. 이곳 사람들은 외출할 때 어린이를 데리고 어른을 부축한 채 무리지어 길을 간다. 삼묘(三苗)와 삼모(三毛)는 소리가 비슷해서 삼모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전에 요임금이 순에게 천하를 선양하려 할 때 삼묘 부락의 우두머리가 이 결정에 반대하자 분노한 요임금이 그를 죽였다. 이 일로 삼묘 부락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떼를 지어 남해로 내려와 살았고 나중에 삼묘국을 이루었다고 한다.
요(堯)는 단수(丹水)의 포구에서 싸워 남만(南蠻)을 굴복시켰다.
남만이라 함은 묘족을 뜻한다. 유묘(有苗)는 구려족( (九黎族)의 후예로 묘민(苗民), 삼묘(三苗)라고도 한다.
8. 이양을 하다.
제요가 왕위에 오른 지 70년 가까이 지난 후 제요는 자신의 제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찾았다. 제요에게는 아들 단주가 있었지만 아버지만 한 덕과 재능이 없었다. 제요는 아들 대신 현명한 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다.
처음에는 허유를 찾아갔지만 한마디로 거절당한다. 후계자를 찾아 신하들에게 추천할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전욱 고양의 후손이자, 효성이 지극한 순(舜)을 추천하였다. 제요는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을 순에게 시집보내고 여러 가지 일을 맡겨 순의 사람됨과 능력을 시험하였으며, 3년 후 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겼다. 20년이 지나자 요는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여 8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다만 《죽서기년》에서는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폐위 감금했다고 나온다.
소유물 :
1. 명협(蓂莢) 또는 역협(曆莢)이라는 풀인데, 돌계단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났다. 매월 초하루부터 한 잎씩 돋아나 보름이 되면 총 15장의 잎이 생기고, 16일째부터는 반대로 한 잎씩 떨어져 그믐이 되면 모두 떨어지고 만다. 작은달(29일의 달)에는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말라버렸다. 이것을 보고 순(旬-열흘), 삭(朔-초하루)을 알았다.
2. 삽포라고 하는 풀인데 부엌의 찬장 속에서 자라났다. 이 풀은 부채처럼 생겨 잎이 저절로 부채질을 하므로 서늘한 바람을 일으켜 파리나 해충을 쫓을 뿐만 아니라 상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3. 식양(息壤)이란 스스로 늘어나는 흙으로 식토(息土)라고도 하며 천계의 옥황상제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갖 작물이 잘 자란다고 한다. 제요의 소유라는 전승도 있다.
기타
: 다음 대의 군주인 순(舜)과 함께 이른바 '요순'(堯舜)이라 하여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신화적 성격이 강한 삼황오제 중에서도 요는 그 고결함이 독보적인 수준. 심지어는 흔히 세트로 묶이는 순 임금과 비교해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순은 형벌을 제정하고 악인들을 귀양 보내며, 후계자인 우에게 명령하여 복종하지 않는 묘족을 정벌하였다. 또한 순은 임금이 되기 전에 가족 때문에 시련과 고뇌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의 삶에서는 그런 고난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하늘과 땅이 요에게 그런 질서를 주었을 뿐이다. 좋게 말하자면 고결함의 끝판왕이지만, 나쁘게 보자면 인간성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신화화된 인물이다.
아무튼 이러한 고결함 때문에 동북 아시아에서는 군주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으며, 태평성대를 이룩한 시기를 요순 시대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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