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 성은 공손(公孙), 희(姬)라고도 하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신분
: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오제(五帝)의 첫번째. 오행 중 토(土)를 관장. 발명, 전쟁의 신. 도교의 시조.
모습
: 얼굴이 4개 있어 동서남북으로 자신의 땅을 바라볼 수가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에는 많은 동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황룡의 모습을 가질 때도 있다.
업적
: 창, 방패, 수레, 의복, 문자, 거울, 60갑자, 절구, 활, 배, 신발, 달력 등 많은 것을 발명하여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어느 전승에는 혼자서 모두 만든 것이 아니라, 많은 귀신들을 부려서 이룬 것이라고 한다.
그의 스승들과 함께 한의학을 정리하여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黄帝内經素問)》, 《황제내경령추(黄帝内經靈樞)》을 만들고, 방중술에 대한 저작인 《소녀경》 등 다양한 서적 역시 황제가 저술한 것이라 한다.
100년 동안 재위하였다.
염제 신농과 치우천왕을 물리치고 제왕이 되었다.
중국 문명의 시조. 도교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한다.
전설 :
1. 탄생
황제의 어머니는 유교씨로 이름은 부토인데, 북두칠성의 첫째별(樞星:추성) 둘레를 커다란 번갯불이 에워싸는 것을 보고, 이에 감응(感應)해서 임신하여 낳은 것이 황제였다고 한다. 어떤 문헌에서는 그가 본래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신이었다고도 한다. 낳은 지 칠십일이 채 못 되어 능히 말을 하였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장성하매 더욱 총명하고 민첩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2. 염제 신농(혹은 그의 자손)과의 전쟁
『사기』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따르면, 그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염제 신농씨의 자손의 덕이 점차 쇠퇴해서 제후들이 서로 침략하고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괴로운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에 황제 헌원은 처음으로 창과 방패를 만들고 곰과 비(羆=큰곰), 비(貔=중간 크기의 표범), 휴(貅=표범의 일종), 호랑이 등을 데리고 침략을 일삼는 제후들을 정복해 나갔다. 마침내 황제와 염제유씨(炎帝楡氏)는 무력에 호소하여 판천(阪泉)의 들에서 싸웠다. 처음에는 쌍방이 서로 고전하였으나 3번의 싸움 끝에 황제가 승리를 거두었다.
황제는 염제의 부락과 합병하여 부락연맹을 결성하였다.
3. 치우천왕과의 전쟁
그러나 치우(蚩尤)는 황제를 따르지 않았다. 치우는 구리쇠(銅鐵)의 이마를 가졌고 큰 안개를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80명에 이르는 그의 형제들은 동물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말을 하는 괴물로, 머리는 동(銅), 이마는 철(鐵)이며, 모래와 돌을 주식으로 삼는 흉포한 패거리였다.
황제는 치우를 토벌하기 위해 6개의 부락을 거느리고 쳐들어갔다. 현재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치우의 80명의 형제는 모두 용맹하면서 난폭하였으며, 부하들도 칼, 창, 활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가 대단히 격렬하였다. 그러자 치우가 이매망량(魑魅魍魎)을 부리고, 마술을 써서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를 만들어내었고 황제의 군대는 방향을 잃어 크게 동요하였다.
치우의 현란한 전술에 곤혹스러워하던 황제는 어느 날 밤 서왕모가 자신을 도와주러 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부하인 풍후(風后)와 함께 제단을 만들어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고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서왕모가 보낸 구천현녀(九天玄女)가 나타나 호부(護符=부적)와 병법을 전해주었다.
다시 전쟁을 치루자 치우는 다시 안개를 피워 황제의 군대를 동요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는 즉시 풍후에게 지남거(指南車)를 만들게 하여 그 위에 작은 철인을 세워두고 팔을 뻗어 남쪽을 가리키게 했다. 이에 방향을 식별할 수 있게 된 황제의 병사들은 안개를 뚫고 돌진하여 치우의 부락을 격퇴하였다.
이리하여 황제는 치우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산해경』 기록에 따르면 황제와 치우는 일찍이 기주(冀州) 들판에서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데, 황제는 응용(應龍)과 여발(女魃)을 시켜 치우를 죽였다고 한다. 『일주서(逸周書)』 「상맥편(嘗麥篇)」에는 중기(中冀)에서 치우를 죽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기나 기주는 탁록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황제와 치우의 탁록 전투는 『상서(尙書)』 「여형(呂刑)」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로 미루어볼 때 탁록 전투가 역사적 배경을 가진, 그 유래가 오래된 역사전설이라고 하겠다. 『사기』 「오제본기」에는 “북으로 훈족을 내쫓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황제가 기주에 진입한 뒤 거주지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취한 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으로 본다.
4. 형천과의 전투
황제와 더불어 상제의 자리를 다투었던 자로는 염제와 치우 말고도 형천(刑天)이 있다. 형천은 본래 이름이 없는 거인이었는데 황제와 권좌를 다투다가 결국 황제에게 목이 잘리었기 때문에 형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형천’이란 바로 목이 떨어졌다는 의미라고 한다.
형천은 염제 신농의 신하였다.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였으며 염제가 우주를 통치할 때에 염제를 위해 음악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강력한 무력으로 염제를 패퇴시키니, 염제는 남쪽 지방으로 쫓겨 가서 남방 상제 노릇을 하고 있어야 했다.
어질고 온화하기만 했던 염제는 분노를 삼킨 채 그냥 그곳에 머물며 다시금 황제와 싸워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형천도 치우처럼 염제에게 병사를 일으켜 황제에게 대항해볼 것을 권했지만 염제는 그냥 그 상황에 안주하려고 할 뿐, 그의 권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형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가 치우가 거사를 하여 황제에게 대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그의 가슴 속에서는 희망의 불꽃이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자기도 얼른 달려가 그 전쟁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러나 염제는 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다. 더구나 치우가 결국엔 패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혼자서라도 달려가야 했다. 가서 황제와 한판 승부를 가려야 했다.
형천은 슬며시 남방 하늘나라를 떠났다.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도끼를 들고서 기세등등하게 황제의 나라를 향해 달려갔다. 물론 그의 앞길은 험난했다. 황제의 나라를 지키는 수많은 수문장들과 싸워야 했지만 그들은 모두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파죽의 기세로 그는 마침내 황제의 궁전에 도착했다.
황제는 형천이 자기와 싸우기 위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 어려웠다. 황제는 보검을 움켜쥐더니 바로 뛰쳐나가 형천과 싸우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그들은 각각 칼과 도끼를 든 채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긴 시간을 그렇게 싸웠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고 어느새 그들은 인간세계로 내려와 서방의 상양산 부근까지 이르게 되었다. 상양산은 본래 염제가 태어난 곳이었는데, 거기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황제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헌원국이 있었다. 헌원국 사람들은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있었고, 꼬리가 머리를 휘감고 있었다. 황제와 형천은 각각 자기들의 근거지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다가 황제가 형천의 허를 찔러 갑자기 그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작은 동산처럼 커다란 형천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나와 산기슭으로 굴러갔다.
형천은 자기의 머리가 없어진 것을 깨닫자 마음이 몹시 급해졌다. 그래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왼손에 쥐고 구부리고 앉아 땅을 더듬기 시작했다. 주위의 산을 모조리 더듬으며 그는 자신의 머리를 찾으려 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나무와 기암괴석들도 형천의 손이 닿기만 하면 잘라지고 부서져 버렸다. 산에는 자욱한 흙먼지가 가득 차고 부러진 나무와 돌덩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걱정되었다. 만일 형천이 자기의 머리를 찾아 다시 목에 붙이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또 황제를 찾아올 것이어서 그야말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보검을 들어 상양산의 가운데를 내리쳤다. 산이 반으로 갈라지니 깊은 골짜기가 생겼고 형천의 머리는 그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산은 다시 붙어 하나가 되었다.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의 잘려진 머리를 찾던 형천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이미 땅속에 묻혀 다시는 찾을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 손에는 도끼를, 한 손에는 길다란 방패를 들고 하늘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눈앞에 있을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죽음을 무릅쓴 결투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상반신의 옷을 벗은 형천은 자신의 젖꼭지를 눈으로, 커다란 배꼽을 입으로 삼았다. 비록 머리는 잘려졌으나, 그의 몸은 머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끊임없는 전의에 불타는 거인의 위용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가슴에 달린 두 눈에서는 분노의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고, 배에 달린 큰 입에서는 적을 저주하는 말들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음모의 칼날에 우연히 머리가 잘려진 것뿐이었다. 그는 절대로 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여전히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었다. 비록 그의 적인 황제가 일찌감치 그곳을 떠나 하늘나라로 돌아가버렸을지라도, 머리가 잘리어진 형천은 여전히 상양산 부근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5. 황제가 되다.
황제가 제왕이 되라는 천명을 받을 때 구름이 서조(瑞兆 :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는 구름으로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운사(雲師)가 되어 군단과 관료에게 구름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또한 거문고와 종을 비롯한 여러 악기를 만들었으며, 도덕률도 정했다고 한다. 황제는 곤륜산에 올라 하늘을 향해 황제가 되었음을 아뢰는 의식인 봉선(封禪)을 행했다. 후세의 황제들도 이때의 의식에 따라 봉선을 행하게 되었다.
6. 황제로서의 헌원
그는 산림을 개척하고 도로를 개통시키는 등 하루도 편안히 지낸 적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해변까지 이르러 환산(丸山:山東省(산동성))에 올라 대종(岱宗:泰山(태산))에 미치고 서쪽으로는 공동(空桐:甘肅省(감숙성))에 이르러 계두산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양자강(揚子江)에 이르러 웅산(熊山:호남성(湖南省))과 상산(湘山:湖南省(호남성))에 올랐으며 북쪽으로는 훈육(흉노의 별명(別名))을 쫓아버렸다.
천지산천(天地山川)의 신(神)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천자가 태산에 올라 토단(土壇)을 쌓고 天神(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태산 아래의 소산(小山)인 양부(梁父)에 내려와 땅을 청소하고 山川神(산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은 황제 때에 가장 성행했다고 한다.
일찍이 구리를 캐서 솥(鼎)을 만들었는데, 세 발과 두 귀가 있는 그릇으로서 천자(天子)의 존위(尊位)를 상징하는 보배로운 솥으로 그 겉면에 만세의 교훈과 법칙을 새겨 두었다. 또한 배와 수레를 발명하고 집을 짓는 법과 옷 짜는 일을 발명했으며, 약초를 조사 분석하여 의료기술을 폈다. 풍후(風后)를 재상(宰相)으로 삼고, 역목(力牧)을 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문자(文字)를 제작하게 하였다.
어느 날 황제는 꿈에 황하에 큰 물고기가 그림을 등에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일월성진(日月星辰)의 형상을 알았다. 대요(大橈)에게 십간 십이지(十干 十二支) 60갑자(甲子)를 만들게 하였으며 용성(容成)은 역서(曆書)를 만들었고 예수(隸首)는 산수(算數)를 고안하여 농업과 제사에 쓰는 물건의 장단, 대소, 경중 따위를 명확하게 하여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하였다. 그리고 영륜은 해곡(곤륜산의 북쪽지명)의 대나무를 써서 12율(律)의 대나무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는 봉황 수컷의 울음소리 여섯, 암컷 울음소리 여섯으로 되어있다. 음양십이율(陰陽十二律)의 음계(音階:중국악기 발달의 기초) 또 육율(六律)의 으뜸소리인 황종(黃綜)의 궁(宮)의 음에서 육려(六呂)가 생기고, 이것을 열두 달에 해당되어서 기후의 관측을 했다. 또 열둘의 종을 만들었는데(十二律에 배합시켜) 어느 것이나 다섯 가지의 협화음(協和音)이 되도록 만들어 졌다.
황제가 구(丘:河南省(하남성))에 있었을 때 서릉씨(西陵氏)의 딸 유조를 얻었다. 그에게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성을 이어받은 (제후가 된) 사람은 14명이었다.
아내는 총 4명이 있었다. 그 중 조강지처이자 본부인이며 첫번째 부인은 누조로,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으며, 황제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네 번째 부인은 모모라고 하는 인물로,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7. 사망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의 죽을 날을 택하였다. 황제는 수산(首山, 산서성)에서 발견한 동(銅)을 형산(荊山, 하남성)까지 가지고 가서 정(鼎)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을 사용해서 신단(神丹)을 완성시키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천계로 데리고 갔다. 황제가 용의 등에 오르자 70명에 이르는 그의 부하들도 올라탔다. 지위가 낮은 부하들은 용의 긴 수염에 매달렸는데 용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하자 도중에 용의 수염이 뽑혀 몇몇은 지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 황제가 만들었던 신단의 제조법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황제구정신단경(黃帝九鼎神丹經)』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포박자》 「극언 편」에서는 열전의 전설을 인용하여, 황제가 만년에 이르러 자 기가 직접 죽을 날을 택했다고 하였다. 이 날에 이르러 그는 신하들과 사별한 후 교산에 묻혔다. 얼마 후 무덤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는데 무덤속에 시신은 없고 그의 검과 신만 있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통선서」에도 전설이 전해오는데, 황제가 100세 되었을 때 수양산으로 가서 구리를 캐어 보정(鼎)을 주조하였다. 보정이 완성된 후에 하늘에서 한 마리 용이 내려와 그를 맞이하자 그는 바로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소유물 :
1. 헌원검 : 광채가 푸르고 투명했다는 것으로 보아 청동검으로 보임. 명나라 때 이승훈(李承勛)이 쓴 《명검기(名劍記)》에서 《광황제본행기(廣黃帝本行紀)》를 인용하며 황제가 만든 동검의 이름을 헌원검이라고 적은 것이 최초이다. 황제가 묘사될 때는 항상 한손에 헌원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2. 현주 : 검은 구슬.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3. 음부경 : 서왕모가 준 병법서. 전신이자 무신인 치우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졌다 한다.
4. 군고(軍鼓) : 치우와 싸울때 치우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만들었다. 기(虁)라는 짐승을 죽여 그 가죽을 북에 붙이고, 뇌수(雷獸, 상상의 동물)의 다리뼈를 북채로 삼았다. 군고의 북소리는 전방 200㎞까지 울려퍼졌고, 그 굉음은 치우군에게 경악과 공포를 심어주었다.
: 여러 책의 저자로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저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도가 : 《황제사경(黃帝四經)》 4편, 《황제명(黄帝銘)》 6편, 《황제군신(黄帝君臣)》 10편, 《잡황제(雑黄帝)》 58편
- 신선 : 《황제잡자보인(黄帝雑子歩引)》 18권, 《황제기백안마(黄帝岐伯按摩)》 10권, 《황제잡자지균(黄帝雑子芝菌)》 18권, 《황제잡자십구가방(黄帝雑子十九家方)》 21권
- 천문 : 《황제잡자기(黄帝雑子気)》 33편
- 오행 : 《황제음양(黄帝陰陽)》 25권, 《황제제자론음양(黄帝諸子論陰陽)》 25권
- 잡점 : 《황제장류점몽(黄帝長柳占夢)》 11권
- 의경 : 《황제내경(黄帝内經)》 18권, 《황제외경(黄帝外経)》 37권
- 경방 : 《신농황제식금(神農黄帝食禁)》 7권
- 방중 : 《황제삼왕양방(黄帝三王陽方)》 20권
- 풍수 : 《황제택경(黃帝宅經)》
기타 :
황제는 염제 신농씨와 더불어 ‘염황’이란 용어로 중국인의 조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중국 상고사 전설시기의 가장 이른 조종신(祖宗神)이다. 황하 유역 일대에서 비교적 세력이 강했던 황제와 염제 부락을 중심으로 화하족(華夏族)이 형성된 뒤로는 전 부족의 시조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 성은 공손(公孙), 호는 헌원씨이다.
상고시대에 희수일대에 형성된 황제족은 강수일대의 강성(姜姓) 염제족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왔다.
그 뒤 황제족 후예의 한 갈래가 지금의 산시(山西)성 남부로 진출하여 중원에 들어와 중국 최초의 왕조 하(夏)를 세웠다. 그 후 산시(陝西)성 경내에서 살았던 희(姬)라는 성을 가진 주족(周族)이 중국 두 번째 왕조 상(商)을 무너뜨리고 주 왕조를 세웠는데, 이 주족이 전통성을 가지고자 먼 조상 황제족에 자신들의 성인 희(姬)를 갖다 붙였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및 『세본』 · 『대대례기』 중에 보이는 ‘제계(帝系)’에는 모두 황제가 소전의 아들로 되어 있다. 『사기』 「오제본기」에는 황제가 “성은 공손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며, 나라 이름은 유웅(有熊)”이라고 되어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역』 「계사」편, 『세본』 「작편(作篇)」편 등 각종 문헌에서 모두 황제 시기에 많은 발명과 창조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산기술 방면으로는 우물, 절구, 활, 승마복, 수레, 배 등이 있고, 물질생활에서는 의상, 털모자, 신발 등의 발명이 있었다. 정신문화 방면에서는 달력, 산수, 악기, 율려(律呂), 의약, 문자 등의 발명이 있었다. 물론 그 중 적지 않은 부분이 황제 이후의 발명과 창조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황제와 그 부족이 이룬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설이다.
신화에 따르면 황제는 신하들을 시켜 수학과 문자를 최초로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루조(螺祖, Leizu)를 시켜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고, 네 번째 부인인 모모(模母, Momu)를 통해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한편 황제의 아버지는 소전(少典, Shaodian)이었고, 어머니는 부보였다. 부보는 불의 신 염제(炎帝, Yandi)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포박자》에 보면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말이 있다. 개중에는 청구국(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다.
황제는 비바람 등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 황제는 전설 속 곤륜산에서 머무는데, 천계와 곤륜산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황제는 모든 신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귀신과 요괴들을 지배했다. 천하를 순시하다 동해 바닷가에 이를 때 백택이라고 하는 짐승으로부터 1만 1520종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을 배웟기에 이후로 귀신과 요괴들은 전처럼 마음대로 날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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