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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이야기/중국

염제 신농(炎帝 神農) - 삼황,의약,약초,농업,불,남방의 신

by 별빛아재 202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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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 출처 : 구글 검색>

이름

 :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본명은 강석년(姜石年)이며, 별칭으로는 열산씨(烈山氏), 염제주양씨(炎帝朱襄氏)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분

 : 삼황. 남방을 다스리는 신. 농업, 의약, 약초, 불, 태양의 신.

 

모습

 : 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

 

업적

 : 당시엔 사냥이 주요 생계 수단이라 인구 부양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식물을 대량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모색하고, 먹을 수 있는 식물과 없는 식물을 구분하고자 자신의 몸으로 확인을 자처했다. 당연히 독초에 중독된 적도 많았으나, 다행히 차를 알게 된 후부터는 웬만한 독초에는 몸이 상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복희의 시대가 수렵(狩獵)과 어로(漁撈), 채취(採取)에 의존한 경제였다면 염제의 시대에 이르러 농경사회에 진입했다고 본다.

 

인간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백초의 풀을 직접 맛보아 해독을 하였으며, 오늘날 한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한의학의 최초의 저서로 유명한 '신농본초경'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최초로 나무를 깍아 호미를 만들고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호미를 만든 농기구의 발명자이기도 하며, 횃불 또한 처음으로 발명하고, 처음으로 우물을 파낸 신이기도 하며, 도자기 굽는 법, 야금술, 옷 짜는 법 또한 발명했다.

 

경제에 관련된 신이기도 하다. 신농씨가 시장이라는 것을 두어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차를 즐기는 중국 문화의 시조이기도 하다. 염제신농국을 세웠고 나라는 그의 자손들로 이어져 8대 520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다. 염제신농씨는 5300년전 중국 섬서성 기산현을 흐르는 강, 강수(姜水)지역에서 자라 지명을 따서 강씨(姜氏)를 득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농은 또 인간이 아버지라는 존재는 모르고 오로지 어머니만을 알았을 때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개념을 만들 었다고도 한다.(부족 전체가 자식 모두를 키우는 집단 육아에서 부부와 가족 개념이 생긴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치우(蚩尤)천왕과 춘추시대 제나라의 왕인 강태공(姜太公)도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염제신농씨는 세계 강씨(姜氏)의 시조이다. 염제신농씨는 황제헌원과 더불어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베트남 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강씨 웅왕왕조가 베트남을 2,000년간 통치함.)

 

황제 다음으로 중국인의 시조로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염제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 외에도 염제와 황제 모두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염황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염제신농. 출처 : 구글 검색 >

전설 :

1. 탄생신화

 『제왕세기(帝王世紀)』 등에 의하면,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女登)은 제후 유교씨(有嬌氏)의 딸이자 제후 소전씨(小典氏)의 비(妃)로, 어느 날, 그녀가 화양(華陽)으로 나들이 갔다가 신비스럽게 생긴 용(龍)을 보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데, 그 후 임신을 하여 열 달이 지나자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반인반신을 낳았으니, 이 아이가 바로 신농이었다.

 

 『진주강씨대동보(晋州姜氏大同譜)』에는 기원전 3218년 4월 26일에 천수(天水: 현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날은 중국에서 ‘신농대제탄신(神農大帝誕辰)' 등으로 부르며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외에도 기원전 28세기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신농씨 이전의 사람들은 풀을 뜯어 먹고 물을 마셨으며, 나무 열매를 채취하고 조갯살이나 짐승의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수인씨(燧人氏: 불을 일으킨 사람)가 부싯돌로 불을 발명하여 사람들이 음식을 익혀 먹게 되면서 인류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복희씨는 그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어획·수렵의 방법과 들짐승을 길들여 기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 또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는 농업의 발명에서 이뤄졌다.

 

2. 우물을 만들고 농업을 가르치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갓 태어나자마자 주위에는 저절로 아홉 개의 우물이 생겨 불이 솟아 올랐다고 한다. 그 우물의 물을 길으면 나머지 여덟개의 우물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태어난 지 사흘밖에 안 지났음에도 저절로 말을 하고 닷새 만에 걸었다고 한다.

 

 신농은 강수(姜水: 섬서성 기산현) 부근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성을 ‘강(姜)’이라 하였다. 그는 사신인수(蛇身人首: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의 여와(女媧)가 죽은 후 큰 덕을 쌓아 왕이 되었으며 화덕(火德)을 지녀 “염제(炎帝)”라 불렀다.

 

신농은 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에게 토지의 성질을 판별케 하고 그곳에 합당한 작물과 오곡을 심게 했다.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신농씨가 오곡의 파종법을 가르치려고 할 무렵 하늘에서 수많은 씨앗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그 씨앗들을 모아 땅에 심었는데, 이것이 인류가 먹는 오곡(五穀)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봄이 되면 파종을 하고 가을이 되면 수확하여, 한 해의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섣달에는 하늘에 보은의 뜻에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밖에도 신농은 따비, 절구 등의 농기구를 제작하고 농사를 위한 달력을 만들었으며, 수리를 위해 우물을 파는 등 농업과 관련된 많은 일을 했다.

 

3. 나라를 세우다.

복희씨의 뒤를 이어 신농씨가 나타나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염제 시대에는 인구가 늘어나서 수렵과 채취만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 신농은 백성들에게 단단한 나뭇가지 끝을 뾰족하게 갈아 그것으로 땅을 파게 하고 나무를 잘라 구부려 만든 쟁기로 풀밭을 개간케 한 뒤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이로부터 수렵과 채취에 의존해 하루하루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경작을 통해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염제신농국'이었다. 『춘추좌씨전』에서는 그가 열산(烈山, 현 허베이 성 수주)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열산씨(烈山氏) 혹은 여산씨(厲山氏)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진(陳: 현 허난 성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에 곡부(曲阜: 현 산둥성)으로 옮겨 140여년 간 통치했다. 신농이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해서 다투지 않았고, 위세는 강했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형벌을 제정했지만 사용하지 않았으며, 법은 번잡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덕화(德化)가 신(神)과 같아서 신농이 다스리는 사방의 백성들 가운데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는 법이 너그럽고 형벌이 관대해서 감옥은 비고, 풍속이 한결같아 간사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처럼 큰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던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20년 만에 붕어하여 장사(長沙: 호남성) 땅에 묻혔다.

 

  신농씨가 천하를 다스리던 시기에 남자들은 공동으로 경작하고 여자들은 길쌈을 하여 생활이 풍요로웠다. 그때는 사람들이 어질고 착해 형벌을 쓰지 않고 무장한 병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천하가 태평스러웠다. 신농이 절기에 따라 땅의 이로움을 분간하고 농기구를 제작해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신농씨(神農氏)”라 부르며 농업의 시조(始祖)로 추앙하게 되었다. 오늘날 근대의 산업혁명 못지않게 원시사회에 큰 변혁을 초래한 이러한 변화를 현대인들은 “농업혁명” 또는 “신석기 혁명”이라 부른다.

 

< 약초를 찾아다니는 신농. 출처 : 구글 검색 >

4. 약초, 의학의 발전

염제 시대 백성들은 불안정한 주거 환경과 불결한 음식 섭취로 인해 질병에 시달리거나 독사·독충에게 물려 고통을 겪다가 죽는 경우도 많았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던 시절 사람들의 수명이 극히 짧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신농은 백성들의 병을 직접 고쳐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어떤 식물이 인간에게 이롭고 해로운지 알아내기 위해 자편(赭鞭)이라는 붉은 채찍으로 각종 풀과 나무를 후려치며 돌아다녔다. 신기하게도 이 자편을 사용하면 그 식물의 독성 유무와 맛은 물론 특성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각지의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수없이 자편을 휘둘러 약초들의 특성을 알아냈다.


신농은 자신이 발견한 약초들이 환자들에게 실제로 효험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온갖 풀들을 직접 맛보고 그 풀의 특성을 파악하여 치료에 이용하였다. 하지만 약초인 줄 알고 먹었던 것이 독초인 경우도 있어 자주 중독되곤 했다. 『회남자(淮南子』 「수무훈(修務訓)」편에 “신농은 일찍이 온갖 풀을 맛보고 물맛이 단가 쓴가를 알아보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알고 피할 수 있게 했는데 하루에 70번 중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약초를 사용해 그것을 해독하였다. 

 

이러한 신농의 희생적인 노력은 마침내 질병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온갖 약초를 맛보느라 하루에 수십 번씩 중독되었던 신농은 어느 날, 단장초(斷腸草)라는 독초를 잘못 먹고 ‘단장(斷腸)’이란 이름처럼 창자가 끊어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신농은 각종 약초를 조합해서 365종의 약을 발명하여 4백 가지 이상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이 발명한 약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본초(本草)』 또는 『신농본초(神農本草)』인데 현재 남아 있지는 않다. 이 책에는 약물의 명칭, 형태, 산지, 채취 시기, 약효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농이 각종 풀의 약성(藥性)을 밝혀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약초들을 분류한 것이 동양 의약의 시초가 되었다. 의가(醫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초학(本草學)의 창시자가 바로 “신농씨”였던 것이다.

 

5. 64괘, 악기, 시장을 만들다.

한편,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신농씨가 복희씨가 창안한 팔괘(八卦)의 가르침을 중시해 팔팔(八八)의 본질을 탐구하여 64괘(卦)를 만들었고 이를 이용하여 점(占)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그리고 낙천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부지런히 일하면서 틈틈이 악기를 제작하여 연주하곤 했다. 그럼으로써 자기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문화생활도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때 그가 제작한 악기는 오현금(五絃琴)이란 것이었는데 길이가 약 113cm였고 여기에 다섯 개의 줄을 달아 각각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라는 명칭을 붙였다. 신농씨가 제작한 이 오현금은 고대사회에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전을 가져와 이로부터 아름다운 곡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밖에도 신농은 사람들에게 한낮을 기해 시장(市場)을 열어 물물교환하게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여유 있는 물건을 서로 교환하여 저마다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어서 생활이 편리해졌다.

 

6. 오강의 형벌

달의 계수나무와 얽힌 염제의 일화도 있다. 염제는 오강이란 이에게 신선 수련을 시켜준 적이 있었는데, 행실이 나쁘기로 유명했던 그의 조카가 오강의 처를 겁탈해 자기의 사생아 둘을 임신시키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오강이 염제의 조카를 죽이자 화가 난 염제는 오강으로 하여금 달로 가 그곳에 있는 계수나무를 배어오라는 명령을 내린다.(이 시기에 겁탈은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건가 아니면 단순히 왕족을 죽인데 대한 형벌이었던건가)

 

오강은 이를 받들어 달로 가 계수나무를 배려 하지만 그 계수나무는 배거나 찍어내는 즉시 상처난 자리가 회복되어서 오강은 영원히 그 계수나무를 도끼로 찍기만 하는 형벌을 받게 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오강의 아내가 달에서 염제의 형벌을 받는 오강을 생각해 자식들을 달로 보내는데, 오강의 아내 겁탈범(염제의 조카)의 아이들이기도 한 자식들은 자신들을 알아보면 오강이 자신들을 해할까 무서워서 두꺼비와 옥토끼로 형상을 바꾸고 오강의 곁에 머물러줬다고 한다.

 

7. 황제와의 전투

일단 신농씨 스스로가 판천에서 황제 헌원과 싸워 패배했고, 그의 후손인 치우와 그의 형제들, 공공, 그의 신하인 형천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과연 치우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던 때, 그는 염제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였다. 또한 중국에게 지속적으로 침략당했던 베트남의 설화집인 영남척괴열전에서도 베트남 민족의 시조인 낙룡군을 염제의 후손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를 보좌하는 신하로 불의 신 축융(祝融)이 있다. 축융은 여름을 관장하기도 하며 용맹 또한 대단했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그의 용맹은 치우나 형천과는 조금 다른 쪽으로 묘사된다. 대표적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신 공공을 참했다고 하는데, 이미 모시는 신인 신농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반기를 든 신농씨의 신하들과는 달리 황제와의 전투 기록이 달리 남아있지 않다.

 

신농의 가계(家係)에 관해서는 당(唐)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를 보충하여 쓴 「삼황본기(三皇本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신농씨는 분수씨(奔水氏)의 딸인 청발(聽詙)을 들여 비(妃)로 삼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제괴(帝魁)를 낳았다. 그 뒤를 이어 제승(帝承), 제명(帝明), 제직(帝直) 등이 차례로 자리를 이어받아, 8대(代) 530년 동안 계속되다가 황제 헌원씨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주(州)·보(甫)·감(甘)·허(許)·희(戲) 등이 강성의 후예로서 제후가 되고 사악(四嶽)을 나누어 맡았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포후(甫侯)·신백(申伯)은 왕실의 지혜로운 재상이 되었고, 제(齊)·허(許)는 제후의 서열에 끼어 중국에서 패(覇)라 일컬어졌다.

위 기록을 보면 헌원씨와 전투한 것은 신농 본인이 아니고, 신농이 죽은 후에 신농을 따르는 세력과 그들을 통솔하는 강씨 왕조가 새로 일어난 세력인 헌원씨와 싸운 것이라 보인다. 온양 방씨의 비조인 방뢰의 아버지가 신농씨의 10세손인데 제호가 유망황제(楡罔皇帝)라는 점을 보아 헌원이 일어나고 나서도 신농의 세력이 잔존하여 신농의 후손인 강씨 왕조와 헌원의 후손인 공손씨 왕조가 서로 대립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이 세력이 패배 후 헌원의 세력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신농의 가계에 대해 다른 기록도 있다. 염제의 아내는 적수씨(赤水氏)의 딸인 청요(聽訞)다. 염제와 청요가 결합하여 염거(炎居)를 낳았다. 염거의 후대가 절병(節幷)이고 절병이 희기(戱器)를 낳았다. 희기는 축융을 낳았고 축융은 강수(江水) 일대로 귀양을 가서 나중에 공공을 낳았다. 공공의 후대는 술기(術器)인데 술기는 머리통이 평평하고 머리 위는 흙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강수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공공에게는 후토라는 아들이 있었다. 후토는 또 열명을 낳았다. 열명은 그 어머니가 십이년간을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다.

 

8. 염제의 딸 여와(女蛙)

발구산(發鳩山)이라는 산이 있다. 산 위에는 산뽕나무 숲이 무성하다. 이 산에는 정위(精衛)라는 새가 산다.​ 생김새는 까마귀를 닮았으나 머리에 무늬가 있으며 부리가 하얗고 발은 붉다. 이 새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둣한 소리를 내며 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염제의 막내딸 여와(女蛙)가 동해로 놀러갔다가 바다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고 정위라는 새로 변했다고 한다. 이 새는 항상 서산(西山)의 작은 가지와 자잘한 돌을 물어다 동해를 메운다.

 

물론 이 여와(女蛙)는 삼황의 여와(女媧)와는 다른 인물이다.

 

< 약초를 맛보는 신농(神農) 출처 : 구글 검색 >

9. 염제의 죽음

몸 속이 훤히 비쳐서 온갖 풀을 씹으며 어떤 풀이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게 되어 의술에도 능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어느날 단장초(斷腸草)라는, 이름대로 창자가 끊어진다는 독초를 먹고 미처 해독도 하기 전에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소유물 :

1. 자편(赭鞭) : 자(赭)는 붉은 흙이란 뜻으로 붉은색의 채찍이다. 그 채찍으로 약초를 후려치면 그 약초가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 한의학 최초의 저서. 원전은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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